사진은 인터넷으로찾은 토벌작전 당시 전경
새벽에 할짓은없고 마냥 일베만보다가 갑작이 생각나서 썰좀풀어볼게
어릴때 할아버지집에가면 자주해주시던 얘기인데 할아버지는
6.25당시 지리산 빨치산토벌작전에 참가하셧어
나는 어릴때 그사실이 얼마나자랑스러운지 여기저기 자랑도하고
다녓고 그이후로는 나이가들면서 까먹고있엇는데
이명박대통령 재임시절 호국 영웅 기장을 수여받으시고 얼마나
자랑스러워하시던지.. 호국 영웅 기장과 참전당시 사진을들고
나한태 자랑하시던 모습은 아직도 잊을수없어 나또한 너무 할아버지가 자랑스럽고
어쨋던 그당시 할아버지는 전경신분으로 토벌작전에 참여하셧는데
주로얘기해주시는 부분이 할아버지가 지리산에 부대원들과 고립됬을때야
할아버지는 당시지금 고등학생 정도되는 나이로 참전하셧는데
눈오는 겨울날 지리산에서 군인들과 빨찌산이 몇일째 지리산에서 전투가 지속됬데
전경들은 이미 산근처 퇴로를 차단중이였는데 군인들과 전투가 몇일동안
지속되다보니 군인들은 보급이 절실해지고 할아버지를포함한 일부 전경을
편성해서 보급을위해 산을 오르셧데 빨치산이 군인들을 포위한상황은 아니여서
보급까지는 쉽게 가능했는데 그이후 눈이 갈수록 많이와서 하산하기에는
너무위험해서 군인들과 남아서 전투를했는데 이군인들이 지리산토벌작전에서
유명한 백선엽장군의 백야전전투사령부 소속 군인이라고 하시더라
그렇게 산에남으셔서 전투가지속되고 몇일뒤에는 하산할수있을만큼
날씨가 좋아졋데 빨치산의 저항도 적어지고 날도 좋아지니 할아버지와
전경들은 하산해서 본대와 합류하라는 명령을받고 하산을시작했지
그당시 하동방면으로 하산을하셧는데 하산하던중 빨치산과 1차교전이 있었데
그과정에서 재대로된 훈련을 받지못한 전경들은 큰피해를 입었고
퇴로라고는 산위로 올라가는 방법뿐이여서 다시 위쪽으로 올라가셧데
그과정에서 근처 빨치산들이 집결해 점점 전경들을 포위하는중이고
그사실을 알수가없는 전경들은 지휘자의 판단대로 근처에 몸을숨기고
안전해지면 내려가려했데 근데 그게 존나 멍청한 판단이였다고 할아버지가
말하시더라 그렇게 포위를 당하던중에 처음교전이있엇던 빨치산들이
숨은 전경들을 찾았고 또다시 교전이발생하고 그과정에서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데..
당연히 본부에 무전때려서 지원을 요청했지만 산위에서는
지금 대성골 전투로 불리는 빨치산을 600명 가까이 죽인 전투가
진행중이였어 포위망에 허점을 만들수 없었던 사령부는 버티라고만 말했대
어쩔수없이 지리산 중턱에서 거의3일을 밤에는 빨치산에게 공격받고 아침에는
포위망을 뚧고 도망가기위해 전경이 빨치산을 기습하면서
밤낮 가릴거없는 전투가 지속됬데 당연히 그과정에서 전사자수는 늘어났고
탄은 떨어져갔지 3일째 밤에는 서로 총알이 거의 다떨어져서 육탄전직전까지
상황이 흘러갔더래 전경 편제를 잘몰라서 당시에 뭐라불렀는지는 모르갰지만
군대로치면 소대장이 지휘중이였는데 본부에 지원을 요청할때마다
돌아오는답은 조금만 더버텨라 라고 하시더라 결국 3일째에도 지원을요청했는데
아는게이들은 알거지만 대성골 전투는 2일동안 진행된 전투야 당연히 이쯤되면
지원을 와야갰지??
사령부는 드디어 지원을 보냈고 지원이 도착하기까지 밤새도록 총알이 다떨어지면
근처에 빨치산 시체에서 총을 노획해서 싸우고 하는식으로 전투를 계속하셧데
그리고 할아버지가 기억하시기로는 1952년 1월 24일 05시 20분경에 지원군이도착해서
살아남은 전경들이 끔직한 지리산에서 벗어날수있엇다고 하시더라
그이후에도 할아버지는 휴전협정이 채결되고 1953년 12월부터 2차토벌작전까지
참전하신후에야 고향인 서울로 돌아가실수 있으셧데
근데 증조할아버지때 건축일로 돈을많이버셧는데 전쟁후에 사업이 망해서..
부산으로 내려오신이후에 지금까지 부산에서 쓰까드시고 계신다
그래서 나도 쓰까게이고 새벽에 쓰다보니가 좀 맞춤법이라던지 신경을 못쓰갰다..
필력도 좋은편은아니라 재밌개 봐줬으면한다 이런일도 있엇구나 정도로
마지막에나오는 날짜는 할아버지가 기억하시는 대로 적은거라 정확하지 않을수도있다
마지막으로 3줄요약
1.할아버지가 빨치산토벌작전 참전하신분임
2.대성골 전투당시 할아버지는 지리산중턱에 고립당하심
3.대성골 전투가 끝나고나서야 겨우겨우 구출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