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기간에나 가끔 도서관을 찾는 고등학생, 대학생들에겐 도서관이 책을 빌릴 수 있고, 공부도 할 수 있으며 종종 친구들과 추억을 쌓기도 하는 공간으로 인식 될 지 모르나, 누군가에게 도서관은 삶의 근거지며, 생활의 터전이다. 특히 수년 간 하루 종일 도서관에서 인생을 소비하는 장수생들에게 그렇다.
대출을 목적으로 도서관을 찾는 이들이나, 도서관에 종종 들르는 중고등학생, 대학생이 도서관의 게스트라면 장수생은 호스트다. 게스트는 호스트의 존재를 잘 알지 못한다. 호스트는 세월이 흘러도 좀체 변하지 않는다. 작년에 매일 같이 도서관에서 보였던 사람이라면 올해에도 매일 같이 보일 가능성이 높고, 재작년부터 매일 같이 보였던 사람이라면 더욱 보일 확률이 높다. 필자의 경우, 얼마 전 도서관을 찾았을 때 6년 전 봤던 사람이 아직까지도 도서관에서 기거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 도서관의 호스트들은 서로의 얼굴을 잘 알고 있다. 하기사 매일 같이 몇 년을 본 사람들인데 서로 모를 수가 있을까. 하지만 이들은 어지간해선 서로 아는 척을 하지 않는다. 말을 트는 관계가 되는 순간 자신의 한심한 장수이력을 부분적으로 공개해야하기도 하거나와, 혹여 또 시험에 떨어져 다시 도서관을 찾게 될 경우 다시 마주쳤을 때의 민망함을 감당하기 싫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모르던 필자는 멋모르던 시절 한 장수생과 인사하고 몇 마디 말을 나누는 사이로 발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시험에 떨어졌고, 다시 찾은 도서관에서 그를 만났으나 쪽팔림에 눈을 피하고 도망치듯 지나갔다. 결국, 다시 아는 척을 할 타이밍을 놓쳐버리는 바람에, 일 년 내내 마주칠 때 마다 눈을 피하는 애매한 관계로 전락한 바가 있다. 마치 안 좋게 헤어진 연인과 매일 같이 같은 공간에서 재회하는 느낌이라 할까.
하지만 예외도 있다. 에피쿠로스는 인간의 필수적인 욕구로 식욕과 수면욕, 그리고 우정의 욕구를 꼽았다. 사회적인 동물인 인간이 어찌 우정 없이 살아갈 수 있겠는가. ‘신림동 신선’과 같이 극도로 긴 수험생활을 하는 장수생이나, 마흔이 넘어 공부를 하는 늦깎이 장수생들은 그들의 삶의 터전인 도서관에서 우정의 욕구를 충족시키기를 갈망한다.
이들은 이를 위해 거침 없이 주변의 수험생들에게 말을 건네고, 생면부지의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에 끼어들어 흐름을 주도하기도 한다. 이들을 이렇게 친구를 만들어 흡연구역에서 함께 흡연을 하며 우정의 욕구를 채워나가는데,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는 사람을 흡연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김영삼이가 민주화 운동 할 때 아들이 군대에 갔는데 부대장이 걔 아들을 사무실로 불러서 군화발로 이마빡을 깠대”
“에이 설마”
“진짜야 회고록에서 봤어. 그래서 나중에 김영삼이가 대통령 된 다음에 보니까 그 놈이 장군이 돼 있는거야. 그래서 김영삼이 걔를 집무실로 불러서 세워 놓은 다음에 군화 신고 그 놈 이마빡을 똑같이 깠대”
“에이 그건 아닌거 같은데”
“진짜야 회고록에서 봤어”
그들의 대화는 이런 식이다. 이들이 대화를 시작하면 주변 흡연자들은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인다. 마치 군대에서처럼,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일 지라도, 그들의 자극적인 이야기는 수험생활에 지친 수험생들에게 잠시나마의 여흥을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