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식충때 친구 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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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19 07:56
고2때까지만 하더라도 난 내신 4.8이란 개병신같은 성적이었지만 모의고사는 2/2/4/1/1이 꾸준히 나오면서 나름 겁도없이 한양대 안산분교, 단국대정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1 전교 394명중에 367등으로 들어왔던 완전 쌩 밑바닥부터 시작해 2학년 11월까지 모의고사에서만큼은 단 한번도 성적 떨어지는 일이 없어서 어쩌면 내가 가진 겁없는 생각은 점차 현실이 되리라 믿었다.
그러나 고3으로 올라오자마자 치룬 3월 모의고사. 내게 29점이라는 수학점수는 충격과 공포의 쓰나미였다. 불과 4개월 전까지만해도 78점으로 2등급을 찍었던 나에게 고3의 첫 모의고사는 신선한 충격이자 고등학교 3년중 첫번째 실패였다. 3/5/5/1/2, 첫 성적하락이라는 통지표를 받아든 나는 오랜만에 느끼는 좌절감에 가슴훈훈해짐을 느낄수있었다. 이미 4.7~5.3을 넘나드는 병신같은 내신점수는 아웃오브안중이었다. 관동별곡 고어체 문장을 던져주고 현대어로 그 문장을 전체 풀이하라는 개좆병신같은 문제에 7점이란 배점을 먹이고, 객관식을 너무 잘봤으므로 서술형을 전부 점수깎기위해 노력했다는 개병신같은 변별력에 질려 난 내신은 이미 손에 놓은지라 모의고사는 정말 중요한 시험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4월모의고사, 수학을 다시 2등급으로 올려놓자 이번엔 국어가 말썽이었다.
원점수가 수학과 3점밖에 차이가 나지않은 개병신같은 점수와 4등급이라는 야구빠따같은 점수에 나는 또다시 좌절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6월, 재수생 늙다리까지 끼어서 시험을 본다는 말에 초긴장을 하고, 필적확인란부터 힘을주어 쓰던 나는 교육청 모의고사보다 크게 오른 원점수를 보고 흡죽해 있었다.
그러나 집에서 확인한 이투스 등급컷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씨발같은 수학은 71점을 맞아놓고도 4등급이 나왔고, 국어는 82점을 사왔는데도 3등급을 먹지못했다. 설사가 또 쏟아지듯 탐구까지 망해 4/4/6/4/3이라는 야구빠따같은 병신력 철철넘치는 점수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7월, 국어 43~45번 지문을 읽고 감정에 복받혀 울다가 국어 망했다.
4/3/6/3/5라는 병신같은 등급.. 내신 5.1이라는 병신같은 등급에 점점 BMW가 나에게 오는거 같았다.
그러나 더욱 이해할수 없었던것은 학원에서 기출문제를 풀때의 성적은 저렇게 병신같지 않았다는거다. 수능도 학원에서 보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발전없는 망상을 하다가 치룬 9월, 4/4/7/4/5라는 답없는 성적을 받아들고 좌절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수시철이 다가왔고. 내신이 똥쓰레기인 다른 병신들처럼 나는 미친듯이 적성전형에 원서를 휘갈겼다.
담임인지 내 안티클럽 회장인지 모르는 선생은 대진,성결,백석같은 처음들어보는 대학을 권했고.. 나는 선생께 빠큐를 외치며 명지,세종,에리카,가천이라는 수퍼한 도박을 결심했다.
그리곤 경기도와 서울에 골고루 7만원의 원서비를 뿌려버렸다.
그리곤 시간은 흘러 10월,
수능 전 마지막 모의고사.. 이제 더는 물러설 곳이 없어보였다. 이것마저 9월같은 성적을 내면 나에겐 BMW가 현실이 될 것이 너무나 뻔했기 때문이다.
그리곤 레드불까지 쳐먹으며 본 시험의 결과는 3/3/4/2/3, 이전까지의 개병신같은 성적보다는 진보된 느낌이라 약간 안심이 되었지만 가체점 이후에 들려오는 수시광탈소식에 더는 안주할수 없었다.
그리고 때는 13년 11월 7일,
드디어 올것이 오고야 말았다. 마치 난 벨기에와의 축구경기에 김승규같은 마음으로 수능을 치뤘고. 한과목 한과목 시간이 지나 어느세 수능이 끝났다.
3년동안 이걸 보려고 이 지랄을 떨었나 하는 허무감과 함께 수험표 뒤에 적은 답을 맞추기 시작했고. 결과는 3/2/4/1/2..!
그러나 실제로 나온 등급은 3/2/4/2/3었다.. 시팔 이투스 개갞끼들....
아무튼 원서상담을 시작했다. 담임인지 내 안티클럽 회장인지 모르는 이 담탱이는 백석대랑 대진,협성대에서 돈이라도 받았는지 나에게 백석 대진 협성을 권했고. 난 담임에게 실망감에 이젠 분노마저 느끼곤 혼자 배치표를 보고 원서질을 시작했다.
그렇게 쓴 학교는 한성대, 순천향대, 성공회대..
그리곤 똥줄타는 합격대기기간이 시작되었다.
먼저 말하자면 3곳 학교 모두 예비였다.
담임년은 너가 서울을 어떻게 가겠나며 실컷 비웃었고, 애새끼들은 공부한다고 꼴깝떨더니 학교도 못가는 병신이라 비웃었다.
그리곤 참석하지 않았던 고등학교 졸업식 이후 차래차래 추가합격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가군의 추합소식이 가장 빨랐는데 한성대에서 합격했다고 전화가 걸려왔다.
그 순간 나는 처음으로 합격이란 순간을 맞이하여 너무나도 벅차올라 나에게 전화를 걸었던 조교에게 연신 고맙다고 울며불며 지금 생각하면 창피한 생난리를 쳤다.
그리고 순천향대에서도 전화가 오고, 마지막으로 성공회대까지 전화가 와서 태어나 처음으로 올킬을 맛봤다.
추가합격 이후 난 3학교의 합격장을 출력해 나의 졸업증을 찾으러 고등학교에 방문했다.
담임면상에 합격증 세장을 던지고 졸업장을 들고오는 나의 마음은 마치 파리를 점령한 히틀러마냥 의기양양 세계정복을 한 것만 같았다.
비록 엄청난 명문대를 간 것은 아니지만..
내게 이 3곳의 학교는 아마 죽을때까지 잊을 수 없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