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가다 하다 만난 안전감시단 누나4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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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가다 하다 만난 안전감시단 누나4 (마지막)

링크맵 0 1,057 2020.03.17 20:46

미칠듯이 햇볕을 내리쬐던 여름도 훌쩍 가버리고 어느새 단풍의 계절이 돌았다.

 

공사현장은 막바지에 이르렀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도, 밤 늦게까지 연장 작업을 하는 것도 익숙해졌다. 식비나 담배, 핸드폰, 그리고 누나와 소소하게 노는 것 빼고는 돈 나갈 일도 없으니 통장에 돈도 두둑히 쌓였다.

 

9월 말 무렵. 담당라인 공기가 끝났고 난 세 가지 갈림길에 섰다.

 

첫번째. 기존에 활동하던 팀을 따라 평택 고덕 현장에 가서 일을 시작할 것인지.

 

두번째. 새로운 팀을 구해서 일을 할 것인지.

 

세번째. 이제 노가다 일을 그만두고 대학을 복학 하던지, 아니면 다른 일을 할 것인지.

 

내가 있던 팀의 팀장님은 나를 아주 마음에 들어 하셨다. 사실 젊은 애들이 노가다를 뛰겠다고 오면 거진 한달도 버티지 못하고 추노를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런데 나는 한 팀에 말뚝 박고 거진 반년가량을 일하니 싹수가 있는 놈이라고 하셨다.

 

나도 이 팀이 맘에들었다. 일단 같이 일하는 형님들도 모두(사실 모두라곤 할 수 없지만) 친절한 편이셨고, 일당도 계속 올라 페이가 아주 좋았기 때문이다.

 

마음같아서는 이 팀을 따라 내년까지 일하고싶었다. 그러면 모아둔 돈을 바탕으로 뭐든 할 수 있을 테니.

 

따라서 두번째, 세번째 선택지는 내게 그닥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이 바로 누나였다.

 

난 누나에게 연락을 했다. 누나는 이제 어떻게 할 거냐고.

 

안전 감시단은 보통 한 라인 공기가 끝나면 같은 현장 다른 라인으로 옮겨 일하기 일쑤였다. 난 누나가 화성에 남을 줄 알았다.

 

그래서 만약 누나가 남는다면 화성에 다른 팀을 찾아 누나와 함께 있을지, 아니면 팀을 따라 평택에 갈 것인지를 고민했다.

 

그런데 들려온 답변은 예상 외였다.

 

"나 이제 이 일 그만두고 서울로 가려고."

 

누나는 고향인 서울로 간다고 했다. 그곳에서 오버워치 누님 중 한 명과 함께 동거하며 오버워치 누님의 지인이 운영하는 화장품 가게에서 일한다는 것이었다.

 

장사도 아주 잘 되는 가게이고, 단순 알바가 아닌 정직원이 되는 일이기에 미래를 생각하면 아주 합리적인 판단이 아닐 수 없었다.

 

평생이고 뙤약볕 내리쬐는 공사장에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아..... 가는구나."

".....응."

 

다만 아쉬웠다. 서울. 내 고향인 경남 창원과 거리도 무척이나 멀다.  더구나 내가 다니는 대학이 서울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대로 헤어지면 사실상 누나를 다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언제 가는데요?"

"바로 다음주야. 일 마무리 되면 짐 정리해서 바로 가야지."

"미리 언질이나 해주지 그랬어요."

"미안해."

 

미안하다고 하며 나를 안아주던 누나의 온기가 아직도 느껴지는 것 같다.

 

"있잖아. 나랑 같이 서울에 내 친구들 보러 가지 않을래? 같이 술 한잔 하자."

 

누나는 내게 오버워치 누님들과 함께 만나 술을 하자고 했다. 난 흔쾌히 승락했고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헤어졌다.

 

난 팀을 따라 평택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현장일이 마무리 된 후 팀장님의 봉고차를 타고 새로운 숙소를 향해 갈 때 온통 누나생각 뿐이었다.

 

일은 바로 시작됐다. 위치가 화성에서 평택으로 바꼈다뿐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었다. 똑같은 일의 연속이었다.

 

단지 차이점이 있다면 흡연장에 가도 담배피는 누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었다.

 

시간이 지나 약속의 날이 되었다. 토요일이었다.

 

난 팀장님께 말씀드려 토요일 일을 하루 뺐다. 감사하게도 팀장님은 흔쾌히 승락해주셨고, 차비랑 술값을 하라며 10만원이란 거금까지 용돈으로 주셨다.

 

난 곧장 버스를 타고 서울. 누나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누나는 구로에 살고 있었다. 나는 난생 처음 서울 구로에 가서 누나를, 그리고 오버워치 누님들을 만났다.

 

누나와 같이 사는 누님은 푸짐하고 인상이 무척 좋으신 분이었다. 다른 한 분은 깍쟁이같은 이미지였는데 나중에 알았지만 눈물이 정말 많으신 누님이었다.

 

그리고 누나는..... 예쁘게 꾸민 모습이 정말로 예뻤다. 평소 공사현장의 작업복 차림 혹은 청바지에 티셔츠, 캡모자를 눌러쓴 모습이 아닌, 화장을 하고 말끔한 옷을 입고 있었다.

 

"누나 그렇게 입고 있으니까 진짜 예쁜데요."

"....아니야."

 

예뻐진 누나의 모습이 (원래도 예뻤지만) 좋았지만 한편으론 조금 허탈한 마음도 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배덕감 같은 것이리라.

 

이제 누나는 나같은 거 잊고 이곳 서울에서 새삶을 꾸려나가겠구나. 하는......

 

"네가 KKK구나? 만나니까 정말 반갑다. 밥 먹으러 가자!"

"네. 누님."

 

오버워치 누님들은 소고기를 사주겠다며 아주 좋은 고기집에 가서 내게 소고기를 먹여주셨다.

 

그러는 동안 나와 누나 사이에 있었던 일, 또는 누나의 옛날 일 등등을 들을 수 있었다. 물론 내 이야기도 들려드렸다.

 

"그럼 넌 이제 뭐 할 거야? 계속 공사일 하려고?"

"글쎄요 ㅋㅋ 일단 내년까지는 계속 하려고요."

 

밥을 다 먹고 우리는 PC방에 가서 함께 오버워치를 했다. 그 순간은 정말 내 인생에 다시 없을만큼 즐거운 순간이었다.

 

거의 내리 4시간 가량을 오버워치로 불태운 우리는 저녁 식사겸 술을 마시기 위해 가까운 술집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엄청. 정말 엄청 술을 마셨다.

 

그리고 깍쟁이 누님의 눈물샘 또한 같이 터졌다. 누나가 불쌍하다며 대성통곡하는 깍쟁이 누님의 모습을 보니 그래도 누나가 친구 하나는 잘 만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버워치 누님들은 내게 누나를 잘 챙겨줘서 고맙다고 연신 감사의 인사를 했다.

 

잘 챙겨주긴 무슨...... 나도 어떻게 한 번 해보려고 수작부린 것 뿐인데. 그런 마음이 들었지만 굳이 티내지는 않았다. 그 순간을 망치기 싫었으니까.

 

술을 진탕 마시는동안 이상하리만큼 나는 누나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주로 오버워치 누님들이 우리에게 질문을 하고 대답하는 형식의 대화가 진행됐으니.

 

2차 3차를 거치니 밤이 되었고, 체력도 한계에 이르렀다. 슬슬 자리가 정리 되려고 했다.

 

그때 누나가 나를 슬쩍 불러냈다.

 

"우리끼리 한잔 더 할까?"

"네 좋아요."

 

누님들은 우리 둘이 한잔 더 하고 들어간다는 말에 아무런 토를 달지 않았고, 인상이 좋은 누님은 나를 꼭 안아주셨다.

 

그리고 나와 누나는 만원에 4캔 하는 수입맥주와 과자 쪼가리를 사들고 모텔방으로 향했다.

 

우리는 술에는 손도 대지 않고, 마지막 전야제를 즐겼다. 아직도 인상 깊은 것은 전야제가 진행되는 동안 쾌락섞인 신음소리보다도 "고마워" "미안해" 라는 말이 더 많이 오갔다는 것이다.

 

새벽이 지나 아침이 밝았고 우리는 땀과 눈물 범벅인 얼굴을 대충 씻고 국밥집에 가서 국밥을 먹었다.

 

그리고 별다른 거창한 작별인사 없이 담백하게 헤어졌다.

 

사실 맘같아서는 일요일 내내 누나와 함께 있고싶었지만 누나는 힘들어서 자고싶다고 했고, 나도 내일 일을 생각하면 얼른 평택으로 내려가 쉬는 편이 현명했다.

 

난 그길로 평택으로 내려왔다. 버스에서 누나와 시시콜콜한 내용의 카톡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버스에서 주고받은 몇 마디 카톡이 마지막이었다.

 

난 누나와 헤어짐에 있어 생각만큼 후유증에 시달리지 않았다. 주말에 조금 심심하긴 했지만 막 미치도록 누나가 보고싶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단지 멋진 사람이 되고싶었다. 돈도 많이 벌고 비까번쩍 해져서 언젠가 누나 앞에 다시 나타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주말에 오버워치를 하는대신 자기계발을 시작했다. 물론 계획대로 딱딱 되지는 않았지만 대략적인 인생의 구도는 잡혔다.

 

가을이 지나 추운 겨울이 오고, 겨울이 지나 다시 꽃피는 봄이 왔다.

 

난 정확히 2019년 2월 23일부로 노가다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본가로 내려왔다.

 

그 기간동안 누나와 한 연락은 일체 없었다. 가끔 누나의 SNS를 염탐하긴 했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집안 사정도 많이 양호해졌고, 나는 내 학교의 자매결연으로 맺어진 일본 대학에 유학을 준비중이다. 아마 6월 전에는 일본으로 떠날 것 같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누나의 근황이 궁금하다. 하지만 연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마치고 좀더 의엿해진 모습이 되었을 때. 그 때 누나를 한 번 찾아갈까 생각하고 있다. 아마 꿋꿋이 잘 살고 있으리라.

 

인생 밑바닥까지 던져진 경험이 내게 가장 값진 추억이 되었다. 난 아직도 그날을 기억하며 감상에 젖곤 한다.

 

긴 글 읽어줘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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