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오후 강의가 끝나고 멍한 표정으로 집에 돌아가려는데
며칠동안을 거의 넋이 나간 반 시체처럼 학교 다니던 제 꼬라지가 걱정스러웠는지
고등학교때부터 친구이자 대학 동기인 녀석이 술 한잔 하자는 겁니다.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라고 몇번을 거절하는데도 친구녀석이 거의 반 강제적으로
학교 근처 먹거리 길목에 위치한 한 호프집까지 저를 끌고 오더라구요
근데 갑자기 맑은 하늘에서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겁니다.
친구녀석은 "거봐라. 니 좀 술 좀 쳐 먹으라고 하늘이 울분을 토한다 토해 그만 고집 부리고 앉아봐 좀"
저는 어쩔 수 없이 반 강제적으로 앉아 술 잔을 기울이며 친구녀석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친구녀석이 무슨 일 있냐며, 꼭 차인 사람처럼 같은 몰골로 다니냐며 끊임없이 저를 추궁했지만
저는 그 친구에게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못한거죠...
창문 밖으로 쏟아지는 빗줄기만 멍하니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웅~~~~~ 웅~~~~~ 웅~~~~~ 핸폰 진동음이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정신 빠져있던 저를 대신해 친구녀석이 제 쪽에 있던 제 핸폰을 보더니
"어? 다운이네 어머니는 누구냐?" "뭐!!"
저는 "다운이네 어머니"란 말에 깜짝 놀라 급하게 목을 풀고 전화를 받았습니다.
"여.. 여보세요?"
"선생님!!!! 혹시 저희 다운이 선생님네 갔나요???"
수화기 너머로 다운이 어머니의 음성에는 다급함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뭔지 모를 긴장감과 불안감이 엄습해 오더라구요..
"아.. 제가 아직 학교라서요.. 무슨 일 있으셔요 어머니?"
저는 다운이의 어머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야 이현성 어디가 어디가냐고!! 외쳐되는 친구를 뒤로한채
미친사람처럼 미친듯이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택시를 잡으려 했습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물에 앞에 안 보일 정도였지만, 저는 고레고레 택시를 불러댔습니다.
그렇게 택시를 잡는 와중에도 제 귓가엔 다운이 어머니의 통화내용만 맴돌았습니다.
"선생님, 사실은요 저희 다운이가 그날 선생님과 마지막 과외 수업을 하고 온 다음부터
계속 밥도 안먹고 학교 갔다오면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선생님하고 과외 하고 싶다고 매일같이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예요
저랑 남편이 아무리 달래고 다그쳐도 선생님하고 다시 과외하고 싶다는 말밖에 안하네요
근데 오늘 제가 오늘 유치원에서 야근 업무가 있어 다운이한테 늦는다고 집에 전화하는데
다운이가 집에 없는지 전화를 받지 않아요. 다운이 핸폰은 어그저께 고장났고
경비아저씨한테 부탁해서 알아봤는데 집에 아무도 없는 것 같다고..
애가 친구들이랑 저녁 늦게까지 놀다 올 애도 아니고..
그래서 혹시나 애가 선생님네 간건 아닌가 해서요.."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찾아볼께요.."
간신히 택시를 잡아 탄 저는 먼저 저희 집으로 향했습니다.
집 앞에 도착한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저희집으로 뛰어 올라갔습니다.
다운아!! 설다운!!! 엘리베이터를 뒤로 하고 계단을 두 계단 세 계단씩 뛰어 올라갔습니다.
그렇게 숨을 허덕이고 저희 현관문까지 도착했지만 그 아이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운아!!!!!
저의 고함소리에 무슨 일 났나 하며 옆집 아주머니께서 문을 열고 나오시며
"아이고 하도 밖이 시끄러워서 누군가했네. 무슨일이야? 뭔일 났어 왜 그래"
"아주머니 죄송하지만 저희 집에 혹시 초등학생 여자아이 하나 왔다 가지 않았나요??"
"아~ 안 그래도 왠 여자아이가 현성 총각네 집 앞에 쪼그려 앉아서 몇시간을 기다리길래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다음에 오라고 돌려보냈지."
전 다시 계단을 미친듯이 내려와 빗속을 헤치며 다운이네 집으로 향했습니다.
도착하자마자 다운이네 초인종을 눌렀지만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습니다.
밖에 나와 다운이네 베란다쪽을 확인해봤지만 집안 불이 꺼져있었습니다.
저는 다시 빗속을 헤메며 다운이네 아파트 놀이터와 다운이네 학교, 정말 미친 사람처럼
다운이를 불러가며 다운이가 있을만한 곳들은 전부 찾아 돌아다녔습니다.
우산을 쓰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상한게 쳐다봐도 상관없었습니다.
비에 홀딱 옷이 젖어 제 꼴이 우습고 빗물에 눈앞이 가려져도 상관없었습니다.
저는 그 아이를 찾아야했습니다. 거의 몇십분을 다운이네 주변이란 주변은 다 돌아다녔지만
저는 다운이를 찾을 수도 만날 수도 없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저는 다시 저희 집으로 향했습니다.
몇십분을 쉬지 않고 빗속에 돌아다녔더니 지치더라구요.. 터벅터벅
저는 다시 집까지 힘없이 걸어왔습니다. 그런데 저희 집에 올라온 순간 저희 집 앞에 쪼그려 앉아
핫바를 오물오물 먹고 있는 다운이가 보였습니다.
설다운!!!!!!!!!!!!!!!!!!!!!!!!!!!!!!!!!!!!!
제 고함에 깜짝 놀란 다운이는 핫바를 먹다 말고 제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곤 얼른 일어나 입을 삐쭉 내밀 "아참! 선생님 어디 갔다오는데 왜케 늦게 와요 내가 몇시간을 기다린줄.."
저는 성큼성큼 그 아이에게 걸어가 그 등에 손바닥을 쎄게 후려쳤습니다
"너 임마! 여자애가 혼자서 어딜 돌아다녀? 어머니랑 선생님이 얼마나 걱정했는줄 알아! 어?
지금이 몇시야 몇신데 어린애가 아무 연락도 없이 여기서 뭘 하는거야 대체!!!!!!!!!!!"
"보고 싶으니깐.."
저는 순간 입이 얼어붙어버렸습니다.
"선생님 보고 싶으니깐!!!!
집에 있음 자꾸 보고 싶고, 학교에 있어도 보고 싶고, 자다가도 보고 싶으니깐
보고 싶어서 왔는데, 보고 싶어서 기다린 건데 왜 때려요 왜 왜 왜!!!"
다운이는 주먹으로 저를 몇차례 치더니 그만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그런 다운이를 저는 안아줄수 밖에 없었습니다. "미안해.. 미안해.. 선생님이 미안해.."
반갑고, 미안하고, 기쁘고, 사랑스럽고, 안타깝고, 고마운 오만가지의 감정들..
그렇게 서럽게 우는 다운이를 달래준뒤 어느정도 추스린 다운이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곤 곧 바로 딸내미 때문에 걱정하시던 다운이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엄마 십분 뒤에 도착하신데"
거실 소파에 쪼글려 앉아 남은 핫바를 먹고 있던 다운이.
"그렇게 울더니 그건 또 넘어가냐?" "치.. 배고프니깐.."
저는 급하게 가스 불을 키고 계란 후라이 두장을 급하게 만들어서 다운이 앞에 갖다놓았습니다.
처음엔 안 먹을 것처럼 그러더니 "안 먹으면 선생님이 먹는다"하니깐 걸신 들린 것처럼 허겁지겁 먹더라구요.
"야.. 아무리 배고파도 여자애가.." 그때 띵동~ "아 엄마다!"
다운이 어미니께선 아이고 선생님 죄송합니다 하시며 조심히 들어오시더니
계란 후라이 마지막 조각을 먹고 있던 다운이를 보시고 냅따 뛰어가 다운이 등짝에 스파이크를 꽂으시더라구요
어째뜬 일은 잘 마무리 되었고 어머니께서는 몇번 더 감사하다고 고개숙여 인사하신 뒤 다운이를 끌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다운이 어머니께 전화가 왔습니다.
다운이 어머니께선 잠깐 망설이시더니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다운이가 저렇게 원하니..
좀 번거로우시더라도 제가 다시 다운이 과외를 맡아달라고 부탁하시더군요
대신 과외하는 장소를 저희집에서 다운이 집으로,
그리고 과외하는 시간도 다운이 어머니께서 퇴근하여 돌아온 시간에 말이죠.
뭐, 뭐든 상관 없었습니다.
그저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다운이 얼굴을, 그 웃는 미소를 다시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기뻤습니다.
그렇게 영원히 이별할 꺼 같았던 다운이와의 관계가 다시금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며칠 후, 다운이와의 단 둘의 첫 과외수업날이 찾아왔습니다. 띵동~띵동~
저는 조심스럽게 다운이네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여보세요~!!" 솜사탕 같이 달달했던 그 목소리.. 한번이라도 다시 그 듣고 싶었던 그 목소리..
"다운아~!!! 선생님이야^^" 이윽고 현관문으로 급하게 뛰어오는 발소리. 달칵 소리와 함께 열리는 문.
다운이와 저 사이를 막던 그 벽이 무너지듯 현관문이 열리며 그 아이가 눈웃음을 지으며 서 있었습니다.
당장이라도 와락 안아주고 싶었던 그 때의 감동.
"어머~ 선생님 어서 들어오세요" 부엌에서 급하게 뒤따라 나오신 다운이 어머니께서 저를 반갑게 반겨주셨어요.
신발을 벗는데 옆에 놓여진 다운이의 검정 스니커즈 신발을 보니 다운이집에 왔던 첫날이 눈에 아른거리더라고요
다운이집은 여전히 깔끔하고 깨끗했습니다.
어색하게 들어오는 저에게 어머니께선 "선생님 식하 하셨어요? 제가 오늘 좀 늦게 오는 바람에..
다운이 밥을 이제 줘서" "아, 전 저녁을 벌써 먹.." 제가 대답하기도 전에
다운이가 제 뒤에서 제 등을 밀면서 "빨리 와욧 같이 먹어요"
저녁을 먹고 왔지만 다운이 성하에 전 저녁자리에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김치찌게, 멸치볶음, 열무김치, 계란말이, 콩자반, 김.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어요~" "아닙니다. 너무 맛있어요^^" "저희 엄마 김치찌게 완죤 맛있죠??"
그렇게 즐겁게 식사를 하는데, 마치 한 가족같이 느껴지는 듯한 설레임을 느꼈습니다.
"아 다른 가족들은.." 저는 조심히 물어봤습니다.
"아~ 밤 늦게나 와요. 큰 애가 하나 더 있는데 고등학생이라 야자하고 학원까지 갔다오느라 늦구요
그래서 저녁은 거의 매일 다운이랑 저 둘이 먹어요. 제가 늦게 올때는 혼자 잘 차려먹기도 하구요"
그렇게 화기애애하게 저녁식사를 마치고 어머니께서 차려주신 과일 접시를 들고 다운이와
다운이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저번보다 깨끗하죠?" 확실히 처음에 왔을 때보다 다운이 방은 더 깨끗하고 깔끔했습니다.
그리고 다운이만의 그 특유의 향이 방 안에 가득 하였습니다.
"자~ 슬슬 시작해볼까?" "아~ 벌써요 좀 더 있다 해요~ 배불러서 안돼용" "잔말말고 책펴!"
시시때때로 다운이의 어머니의 감시가 있었지만
매일매일 다운이만의 둘 만의 과외 시간은 너무나 즐겁고 달콤했습니다.
과외하는 내내 방안에선 웃음이 끊이지 않았고, 하루하루가 행복의 연속이었죠.
그러던 어느날, 다운이 어머니께선
"선생님 죄송해요 오늘 유치원 회식 때문에 제가 좀 늦을 것 같아서요. 저희 다운이 과외 잘 부탁드릴께요"
어떨결에 다운이와의 단 둘만의 시간을 가지게 된 겁니다.
내심 제 마음은 설레고 두근 거렸지만, 절대 다운이 앞에서 그런 내색을 안하기 위해 노력했죠.
"다운아~ 선생님" "암호를 대라!" "좋음 말 할때 안 열어?--"
이내 달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순간 조금 놀랬습니다. 늘 바지만 입던 다운이가 처음으로 빨간 스커트를 입은 겁니다.
머리모양도 평소 반묶음 머리가 아닌 긴 생머리.
한층 더 여성스러운 다운이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심장이 두근 거렸습니다.
"선생님~~~ 오늘은 우리 둘뿐이니깐 놀아요~~~" "무슨 소리야 놀긴 뭘 놀아 얼른 책펴"
아.. 이런 반듯한 저의 모습에 제 스스로가 답답하더라구요.
다운이는 입을 삐쭉 내밀며 "피..." 책을 폈습니다. 한참 공부 지도하는데
다운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고 말했습니다.
"저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