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얼굴을 스쳐지나갈 때마다 피부의 감각은 둔해지고 이 느낌은 군대있을때랑 비슷하다.
이상하게 현장에는 유독 바람도 많이 불고 추운 것 같다. 심리적인지 아니면 진짜 그러한지.
크리스마스는 휴일이지만 직원 절반이 조를 짜서 나왔고 나도 딱히 할것도 없어서 나왔다.
업체들도 절반 나왔고 일을 대부분 일찍 끝마쳐서 오후 네시반이 좀 넘었는데 벌써부터 한산하다.
현장을 한바퀴 패트롤 하고 이상유무를 점검한 후 사무실로 왔다. 임기사랑 같이 할것도 없는데 소주나 한잔 하자고 해서 삼겹살 집으로 향했다.
그날 우리는 꽤 취해서 많은 얘기들을 나눴다.
인턴 김기사부터 현장 돌아가는 일까지.
임기사는 아 그랬냐고 미안하다고 했다.
물론 임기사얘기는 진실을 다 얘기하지는 않았다.
둘이는 그렇게 술을 마시고 이차로 어디갈까 고민 중 임기사가 말했다.
"김기사님 우리 오늘 졸라 우울한데 안마방 콜?"
아.. 그건 아닌거 같았다.
하하 대충 얼버무리며 호프집에 가서 골벵이에 맥주 한잔씩 더 하고 헤어졌다.
집에 와서 씻고 누으니 아홉시 좀 넘었다.
다들 뭐하고 있으려나.
전 여자친구는 오늘 새로운 남자친구와 즐겁게 지내겠지. 아니 이브날 어제 재밌게 보냈겠구나.
쓸쓸한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나니 종무식부터 올해가 가기 전 바빠졌다.
어리버리 파카를 껴 입고 밖에서 지내는 시간이 훨씬 더 많았던 나는 종무식 때 한마디 돌아가면서 하는 타이밍에 앞으로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했더니 소장님이
"열심히만 가지고는 안돼. 잘 해야지."
직원들은 하하하하 웃었고 소장님도 웃자고 던진 말이지만 그 말이 나에겐 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그래.. 이왕 하는거 잘 해야지 열심히 해서 최대리에게 물어다주는 일을 반복하지는 말자.
신년 당직도 자발적으로 지원했다.
새해 아침 가족들과 이른 떡국을 먹으며 덕담을 주고받고는 출근했다.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고 혼자다.
온풍기 한대만 틀어놓고 발 밑에 전기난로를 켜 놓으니 그래도 따뜻하다.
컴퓨터를 키고 올해 내가 하고자 하는 목표를 적어봤다.
1. 코어 타설완료
2. 포디엄 골조 완료
3. 토목공정 종료
4. 외장 및 마감 착수 후 공정준수
쓰다보니 웃음이 나왔다. 아 뭐 이런 내 신년계획인데 일 얘기밖에 없냐.
다시 썼다.
1. 전 여자친구 잊기.
2. 새로운 인연 만나기.
3. 사람들에게 더 친근한 이미지 구축하기.
4. 욕하지 않기 화내지 않기.
차마 금연은 적을 수가 없었다. 이거마저 없다면...
작심삼일이라도 좋다. 계속 저걸 상기시키고 나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싶었다.
새해부터는 여자친구를 잊기로 했다. 이정도 시간이 지났으면 이미 행복하게 지내고 있을거고 나 또한 그 동안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다 싶드라.
예전에는 눈만 감으면 여자친구의 뽀얀 피부와 빨간 입술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지만 어느순간 점점 클로즈 아웃 되면서 전체적인 모습이 되어 나타났다. 그렇게 점점 멀어져가는구나.
인턴 김기사에게 여자친구 소개를 시켜달라고 할까 하다가 말았다. 아직 그럴 여유는 없었다.
새해가 되고 신년인사를 직원들끼리 모여 하고부터 다시 본격적으로 바빠졌다.
데크 플레이트가 깔리기 시작했으며 관리범위가 넓어지다보니 빵꾸나는 일도 많았다.
일을 최대리랑 진심으로 나누고 싶었지만 여전히 내가 속한 팀은 수직적인 관계에서 개선이 없었다.
그러나 검측이 자꾸 빵꾸나고 박차장이 감리실로 한번 불려가고 나서부터는 박차장이 이공구 내에서도 최대리와 업무 범위를 쪼갰다.
오예! 바라던 바다!
난 잔여토목 업무와 B4 구간 기초타설 후 들어설 코어관리를 하기로 했고 최대리는 이공구에서 진도가 빠른 동 즉 내가 담당하던 업무를 떠안게 되었다.
최대리는 네 알겠습니다! 하고는 말했지만 현장을 잘 나가는 편도 아니었고 항상 업체 사무실에서 지시를 하거나 보고받곤 했다.
문제는 내가 최대리보다 짬이 안되고 그 동안 소장들을 쥐락펴락 길들여놔서 항상 내 일은 뒷전으로 밀리기 일쑤였다.
그리고 허드렛일은 내가 다 하고 검측이라던가 세세한 작업지시 청소 이런거는 여전히 내가 했다.
"최대리님.. 저 검측 좀 받아주심 안되겠습니까?"
최대리는 불같이 화를 내며 내가 검측따위를 받으려고 대리를 단 줄 아냐 화를 냈다.
하..
여전히 빵꾸가 나고 잘 돌아가지 않았는데 박차장은 최대리를 탓하기보단 신규직원 투입을 생각했다.
그리곤 타 준공현장에 있던 현채직 사원을 데리고 왔다.
조대리...
조대리는 경력 오년 좀 넘었고 일반 아파트만 하다 와서 그런지 철골과 코어월 등의 업무에는 많이 서툴렀다.
그리고 말수도 적었다. 나이도 최대리보다 두살 많았지만 최대리에게 항상 최대리님 최대리님 존대를 했고 최대리는 당연한 듯이 조대리! 하면서 작업지시를 하곤 했다.
조대리와 함께 현장을 누비며 일을 가르켜주고 또 도움도 받고 하다보니 구정이 다가왔고 마찬가지로 쏠로인 나와 조대리는 번갈아가며 당직을 섰다.
조대리는 참 말이 없었다. 예전 채대리와 비슷할 정도로 자기 일만 했고 사무적으로 대화하고 술자리도 잘 가지 않았다.
봄이 다가올 무렵 본사에서 메일이 한통 포워딩 되서 왔다.
신입사원 채용보조하라는 메일이었고 우리현장은 김기사가 가겠다 라고 공무팀장님이 회신한 이메일이었다.
최대리는
"짜샤 이거 원래 공채중에서도 선택받는 사람들만 가는건데 내가 힘써서 너 밀어줬다. 물론 나도 갔다왔지. 가서 우리회사가 어떤 인재를 뽑는지 잘 보고와"
정해진 날짜에 면접 진행 보조를 하러 갔다.
오랜만에 입은 양복은 낯설다.
면접 대기장소에 도착하니 동기 한명이 있었고 나머지는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인사팀의 지시를 받고 곧 올 신입사원들의 서류확인 업무부터 하기로 했다.
내가 했던 일은 표에 적혀진 스펙과 면접자들이 들고 오는 서류 진위여부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뜨문뜨문 오다가 우다닥 사람들이 몰아닥쳤다.
하나하나 확인하다가 재밌는 원칙이 있음을 알게됐다.
S대는 학점 삼점영 미만이어도 서류 합격했고
KY대는 학점만 넘으면 통과
그 밑으로 서울중위권과 거점 국립대는 자격증과 영어 성적이 필요했고
기타 대학교는 평균 학점 사점을 넘는건 기본 자겨증도 많았고 토익도 구백점에 가까왔다.
아.. 서류전형에서 이런 필터링이 있구나.
한 응시자가 토익 복사본을 가져와서 애타게 쳐다보며 깜빡잊고 원본을 안가져왔다 했다. 인사팀에서는 꼭 원본을 접수 받으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안된다고 했는데 좀 봐달라고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서 인사팀에 말했더니 단칼에 가서 뽑아오던지 아니면 면접에 응시할 수 없다 했다. 그 지원자는 알았다며 나갔고 그 뒤로 보이지 않았다.
서류확인이 끝나고 각 면접실로 사람들을 호명해서 면접실 앞에 대기시키고 순서대로 들여보내는 업무를 맡았다.
그 전에 인사팀에서는 오늘 현업에서 뛰는 선배님들이 지원하고 있다면서 하나씩 소개시켜줬다.
아 맞다 일년전에 나도 저 자리에 앉아있었고 누군가가 앞에 나와서 뭐라 했었지..
차례차례 이름을 부르고 다섯명씩 면접 대기실 앞에 앉히고는 똑똑 문을 두드리고 들여보내는 업무는 쉬워보였으면서도 바빴다.
하나가 들어가면 또 하나를 의자에 채워놓고 하나씩 땡겨앉고..
대체적으로 지원자들은 준수하게 대기했고 나 또한 작년 저맘때가 생각나서 긴장풀고 잘 하라고 응원해줬다.
각 지원자들의 출신학교나 정보들이 한줄로 적혀있었고 이들은 이 한줄을 위해 사년 또는 그 이상 대학교에서 준비를 했었겠지. 나 또한 그랬었고.
각 면접자들 이름 옆에는 공란이 있었고 거기는 지원자들의 대기태도/인성 항목이 있었다.
이건 면접 진행보조자들이 체크할 수 있는 칸으로 대기할 때의 자세가 불량하거나 흐트러졌을 때 체크하는 칸이라 했다.
다른회사는 모르겠지만 이 칸에 체크가 되면 대부분 떨어졌던 것 같다.
나 또한 그 수많은 응시자들 중 딱 한명이 전화하며 아니 뭐 여기는 함 와봤지 어떤지... 될거 같어라고 너스레를 떨며 삐딱하게 앉아있던 응시자 한명을 체크했고 그 체크 때문인지 아니면 면접을 잘 못봤는지 OT 진행 보조때는 안보이더라.
하나씩 안에 넣으며 면접을 소화시켰고 시간도 얼추 흘러 몇 안남았다.
한 지원자가 엄청 초조해하며 불안해 했다.
긴장감을 풀어주려 말을 걸었더니 자기는 여기가 마지막이라 했다. 다른데 다 떨어지고 여기만 남았는데 잘 봐야 하는데 걱정이라고 했다.
지방대학교에 학점 4.2 토익 920 각종 자격증 여섯개에 어학연수까지.
긴장하지 말라고 심호흡을 시키고 들여보냈었는데...
불행하게도 이 친구도 OT때 볼 수 없었다..
면접보조가 끝나고 인사팀으로부터 이 기수가 확정될때까지 계속 지원을 부탁한다고 말을 듣고 다시 현장에 복귀했다.
최대리는 꼬치꼬치 캐물었으나 얘기하지는 않았다. 그거 얘기하면 또 퍼지고 할거 뻔하니까.
다시 일상에 복귀해서 바쁜 날을 보내고 있는데 못보던 전화번호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오빠 나야. 잘 지냈어? 요즘 통 못봐서 전화했어."
누구지...?
"아 예 누구세요..?"
"엇 이거 XX씨 전화 아닌가요?"
"맞는데 누구..시죠?"
"아... 저 다희인데 기억 못하세요? 오빠?"
다희가 누구지.. 아. 그때 그 여자!
"헐 오랜만이네 미안. 전화기가 맛이가서.."
다희는 자기 곧 그만두고 복학할거라며 한번 놀러오던지 아님 시간내서 보자고 한다.
아니 왜?
일단 알겠노라 하며 전화를 끊었지만 왜 뜬금없이 전화를 했는지.. 영업전화인가.
잠시 후 문자가 왔다.
[혹시.. 급작스러운 전화에 부담됐다면 미안해 오빠. 그냥 생각나서 전화한거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