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아침 눈을 떠서 휴대폰을 바라보니 여자친구로부터 부재중 전화라던가 문자 한통 없었다. 내심 아쉬움을 느끼며 출근했고 평소와 같이 업무를 했지만 정신은 이미 안드로메다로 가 있었다.
이제 역으로 내가 조급해하고 궁금해하는 상황으로 전개됐고 믿음과 신뢰가 깨진 것 같은 그런 마음이었다.
점심시간에 살짝 전화를 했는데 안받는다.
속은 까맣게 타들어가고 도대체 어제 네비소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렇게 믿었던 여자친구는 나몰래 바람이라도 피는게 아닐까 언제부터인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깊어져만 갔다.
아.. 그날 그 회식.. 이과장의 더러운 기름끼가 내 여자친구 입술에 닿았던 그 날...
근데 그거 다 풀렸는데 왜 그러지.
공대생인 나는 논리적으로 풀어가려고 안되는 머리를 굴리며 생각하고 생각해봤지만 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일과시간이 끝나고 다시 전화를 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전화를 받는 여자친구의 목소리가 화가 치밀어올랐다.
"너 어제 교무실에 있었다며 이상한 소리 들리던데..?"
"... 무슨? 어제 퇴근하고 바로 잤어."
하...
뭐지 이건. 바람난건가.
"그래?.. 응 알았어. 우리 이번주에 함 볼까?"
여자친구는 주말에 가족들하고 놀러가기로 했다고 하며 다음에 보잰다.
아쉽게 전화를 끊고 불안해졌다.
생전 이런일이 없었는데. 도대체 누구지.
학교에 여선생 비율이 높지만 남선생도 있고 미혼인 선생들도 있었다.
생각해보니 난 여자친구가 학교 선생들하고 어울려 저녁을 하거나 회식 하는걸 극도로 싫어했었다.
괜히 취준생인 내 입장도 초라했고 여자친구는 믿지만 골대에 골키퍼가 있다고 안들어가냐 열번 슛 하면 한번은 들어가는거 아니겠는가 라는 되도않는 개똥철학으로 여자친구 단속을 했었다.
학교에서 무슨일이 있었는지 조잘조잘 얘기해주던 여자친구의 입술이 떠올랐다.
내가 취업하고부터는 당장 내 일에 대한 스트레스와 긴장감에 데이트를 한다고 만났어도 심각한 얼굴이었지.
마치 무성영화의 한 장면처럼 이쁜 여자친구는 미소를 지으며 말 하고 있었는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분명 자기 얘기였는데 난 대충 들었고 지금에서야 여자친구가 학교 관련해서 무슨 말을 했었는지 난 전혀 기억도 못한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 때부터 상황은 역전되기 시작했다.
내가 전화를 하고 문자를 하고 틈틈이 짬내서 할 말도 없지만 전화해서 뭐해?? 라며 물었고 그렇게 수화기를 넘어 어색한 침묵의 시간도 늘어만갔다.
그렇게 애간장이 타던 어느 날 여자친구는 만나자고 했고 박과장에게는 오늘 좀 급한 약속이 생겨서 일찍 퇴근해도 되냐고 물었고 처음으로 해가 하늘이 떠 있는 오후 여섯시에 현장을 나섰다.
명동거리이 있는 자주갔던 커피숍에 여자친구는 먼저 나와있었고 오랜만에 본 여자친구는 너무 이뻤다.
최대한 나의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예전처럼 장난쳐가면서 저녁이나 맛있는거 먹으러 가자고 했는데 자기 저녁 약속있단다.
그리곤 조용히 그리고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생각해봤는데.. 우리 서로 생각 할 시간을 좀 갖자. 지금 상황에서는 계속 이런 관계면 더 힘들어질거 같아..."
난 그저 암말도 못하고 바보처럼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그래 저 이쁜 입술. 저 입술로 항상 미소지으며 나에게 얘기를 했고.. 내가 기습뽀뽀를 할 때마다 따뜻하게 반겼었지. 근데 지금은 내께 아닌 것 같아.
"혹시 너.... 만나는 사람 생겼냐?"
긴 침묵속에 내가 툭 말을 던졌고 여자친구는 그런거 아니라고 했다.
오늘따라 여자친구가 엄청 이뻐보인다. 지금 당장 여자친구를 껴안고 뜨거운 사랑을 하고 싶다. 그런데 여자친구와 내 사이에는 무언가 알 수 없는 투명 유리.. 반강화 이중접합 복층유리 56mm 짜리가 로이코팅되어 튼튼한 알미늄 프레임 안에 단단히 고정되어 놓여있는 느낌이었다.(개드립 죄송합니다)
마침 여자친구의 휴대폰이 울렸고 여자친구는 네 금방 갈께요.. 하고 얼릉 끊었다.
"나 이제 가봐야 해.."
짧은 삼십분여의 만남이 끝나고 여자친구는 말 없이 일어섰다.
난 잠시 앉아 테이블 위에 있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얼음이 다 녹아 밍밍해질 때까지 멍하니 있었다.
건설회사를 괜히왔나.
정신을 추스리고 보니 텅빈 마음 한구석에 칼로 뭔가 휘휘 내지르는 것 같았고 누군가가 나의 심장을 꽉 움켜쥐는 것 같다.
커피숍에서 나와 집으로 향했다.
하늘은 붉게 물들어가고 어디선가 김종국의 한남자 노래가 흘러나왔다.
차인건지 아니면 잠시 시간을 갖자는게 호전되기 위한 절차인건지 모르겠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당시 여자친구는 너무 불안해서 매일같이 울었고 내 전화가 오면 그렇게 기뻤다고 하드라.
그리고 그 날 네비게이션 소리가 나오던 것도 친하게 지내던 학교 여선생들과 함게 저녁먹고 영화를 보기 위해서 이동 중이었고 괜히 힘들게 일하는 나를 생각해서 영화본다는 것이 미안해서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했다고 하드라.
그런데 그 날 이후로 내가 너무 집착을 하고 술먹고 전화해서 힘들다고 하소연 하고 그러니 점점 마음이 멀어지고 이렇게 지내는 것 보다는 좀 거리를 두고 지낼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었다더라.
그 날 이후로 나의 심장 한켠은 구멍이 뚤린 채 다람쥐 챗바퀴 돌 듯이 현장 술 집 현장 술 집을 반복했고 점점 신입사원의 패기는 없어지고 현장 펜스근처 가설통로 난간대에 기대어 백호의 상차를 멍하니 지켜보고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채대리가 사표를 냈다.
이과장의 표정은 어두웠고 소장님실에서 면담을 하고 나온 채대리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박과장과 채대리는 한참을 얘기하더니 나에게 왔다.
"김기사. 음.. 채대리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서 조만간 그만둘 것 같어. 좀 갑작스럽게 결정된거긴 한데 니가 이공구로 좀 가줘야겠다."
"네??"
또다른 직원이 투입되기전끼지는 시간이 걸리고.. 일공구는 임기사가 있으니 이공구는 채대리 나가면 실무 뛸 사람이 없잖아? 나중에 사람 충원되면 다시 같이 일하자. 좀 미안하게 됐다. 오후부터 채대리한테 인수인계 받고 다음주부터는 이과장님과 함께 해."
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