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해군 갑판병으로 상륙함이라는 배를 탔다.
거기서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이병때 병장이 배 옆면 칠한다고 밑에서 페인트통
내려달라고 했는데 실수로 대가리쪽으로 놓쳐서
병장녀석 기절한 일도 있었고, 그 일로 말미암아
고문관으로 찍혀서 괴롭힘 당하고 그러다보니 점점 더
내가 병신이 되어가는게 느껴지더라. 자살생각도 엄청
많이 했고.. 그러다가 또 상병쯤 되니 극복하고 성격도
좀 덜 날카로워 지고 긍정적으로 변하기도 하더라.
뭐 군대 이야기만 해도 길지만 어쨌든 그렇게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누나와는 간간이 전화통화를 했고
친누나처럼 농담도 하고 점점 친해져갔다. 누나는 힘들고
지루한 군생활에서 박카스같은 존재였다.
난 여자친구가 있었다. 01년도에 처음 누나를 만났을 때
부터 나에겐 여친이 있었고, 이 여친은 행시에서 사시로
바꿔가며 공부하면서 내가 전역할때까지 기다려준 의리가
있는 여자였다. 여친 또한 길어지는 고시공부로 힘든 시기
였으니, 서로가 서로를 북돋으며 기다렸다고 봐도 될까.
그런 서로 힘든시기에 있는 오래된 여친과는 별개로
누나와의 통화(가끔은 편지)는 또 새로운 기분으로 나에게
다가왔지만, 3년넘게 알면서도 단 한번만 만난 사이라는건
제대하고 나서 만나겠다..라는 현실적인 의미가 아니었다.
그러는동안 2004년 9월에 제대를 했다.
앞서 말했듯 여친은 나를 기다려줬고 난 학교에선 멀지만
여친 집에서 가까운 일산 근처에 오피스텔을 잡았다.
마침 군대가기 전 그렇게 미쳐서 하던 디아2를 이어
블리자드는 와우를 출시했던게 그 시기였던것 같다.
바알과 소새끼들 대신 멀록과 악어사냥으로 또다시 밤을
지새고 남는 시간은 여친과 만나서 자취방에서 알콩달콩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누나와의 연락도 뜸해졌다.
2004년 연말즈음이었나. 누나가 얼굴 한번 보자는 문자를
보내왔다. 근 3년이란 시간동안 단 한번밖에 만나지 않았
기에 조금 가벼운 부담감과 흥분감이 있었지만, 어쨌든
우리는 그해 말 대학로에서 만났다.
긴 머리였던 누나는 짧은 단발로 스타일이 바뀌었지만
그래서인지 3년이 지났음에도 오히려 더 어려보였다.
24살 나와 29살 누나가 들어간 술집에서 오히려 누나에게
신분증 검사를 할 때는 자존심 상한다기 보단 이런 여자와
같이 있어 뿌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병맥을 마시자길래 가볍게 마실 줄 알았지만 우리가 마신
병 수를 나중에 세어보니 20병이 넘었던 걸로 기억한다.
술을 취하는 동안 어색함은 친근함으로 변해갔고 이런저런
지나간 이야기를 하면서 "이 누나 진짜 예쁘구나"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마로니에 공원 쪽으로 누나를 배웅하려고 걸어가면서
여자친구 안부를 묻길래, 여친에겐 미안하지만 헤어졌다고
구라를 쳤다. 오늘 누나를 보내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나, 술 너무 먹었는지 정신을 못차리겠다"며 도로옆에
앉아 버렸다. 일부러 술이 떡이 되서 대답도 잘 못하는 척
비적대자 누나는 일으켜 세우려고도 하고 등도 때려봤지만
난 그냥 생까고 이대로 집에 못 갈것 같다고 했다.
"그럼 어떡할건데!~"
"저기.. 잠깐 모텔에서 나 눈 조금만 붙이고 갈게.."
"미쳤냐 ㅋㅋ 너 정신차려. 구라치는거 다 보여"
어떻게 눈치챘는지 그런 말을 듣고 나니, 순간 뻘쭘해져서
그냥 일어났다. 그리곤 용기를 내서 말했다.
"나 누나 좋다..."
여친에게 미안했다. 그렇지만 오늘 누나를 만나서 계속
생각했던건 그 때, 그 정모때 본 이후 난 누나를 역시
좋아하는구나.. 했던거다. 그래서 후회하지 않았다.
"나도 싫진 않아.. 근데 넌 막내 남동생이랑 동갑이고.."
난 누나에게 키스했던것 같다. 사실 오래전이고 실제로 술
도 많이 취해서 그 이후의 기억은 정확하지 않다.
우린 그날 저녁 대학로 거리에서 오랫동안 앉아서 이야기
했고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